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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를 거닐다, 중동성당, 공산성, 공주하숙거리
    여행기행 2023. 2. 26.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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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 공산성 부근

     

    여행에서 역사를 배제할 수 있을까. 쇼핑이나 공연, 문화 예술 같은 콘텐츠가 풍부한 대도시라면 가능할지 몰라도 소도시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변화가 더딘 만큼 과거가 미처 스러지기 전에 오늘이 와버린다. 폭풍우가 몰고 온 파도는 해변을 냉큼 삼켜 뒤집어놓고 가지만, 미풍이 떠미는 잔잔한 파도는 모래사장에 스며들듯 왔다 간다. 


    잔잔한 해수면에 모래는 쓸려갈지언정 자갈은 남는 것처럼 시간의 자취가 켜켜이 겹치는 게 소도시의 흔한 풍경이다. 공주에도 과거와 더 먼 과거가 혼재해 있다. 삼국 시대부터 현재까지 1,500년 이상의 역사가 겹치고 겹쳐 머물러 있다. 그렇다고 거창하거나 웅장한 모양새는 아니다. 


    송산리고분군이나 공산성 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백제 시대 유적지도, 100년 역사의 건축물이 남아 있는 원도심도, 천년 고찰이 자리한 계룡산 명승지도 1시간 안팎으로 둘러볼 만큼 아담하다. 다시 말하자면, 위용에 눌리거나 숨이 턱 막힐 듯한 압도적인 감상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지나온 다음에야 다시 떠올린 공주는 순박하면서도 어설픈 인상이다. 그 안에서 비교적 똑부러진 인상을 남긴 건 ㄱ자로 대차게 휘돌아 가는 금강과 하늘을 향해 뼈마디 같은 바위를 뻗어 올린 계룡산 정도. 그마저 봄빛에 홀려서인지 수더분한 풍경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공주 하숙거리


    공주의 원도심은 걷기에는 멀고 차를 타기에는 가깝다. 이제야 느끼건대 피로를 잘 모르는 건강한 다리나 자전거가 있으면 딱이겠다. 공주에는 공공 자전거가 잘 구비돼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 여파로 운영이 중지되지만 않았어도 분명히 자전거를 빌려 탔을 테다.

    공주는 예부터 금강 이남 지역으로 도시가 발달했다. 삼국 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다져진 삶의 터다. 백제 시대 문주왕은 공주(웅진)를 도읍으로 삼고 강변과 행정구역, 민가 일부를 토성(웅진성)으로 둘러쌌다. 웅진은 64년간 백제의 도읍이었다.

     

    시간이 흘러 백제의 시간은 이지러지고 조선 시대가 찾아왔다. 토성이던 웅진성은 석성으로 개축됐다. 금강을 잇는 다리도 만들어졌다. 

    초가집이허물어지면 초가집으로, 기와집이 무너지면 기와집으로 다시 지었다. 도시는낮고 좁았다. 대부분 사람들이 땅에 바싹 붙어 논밭을 부쳐 먹었다. 한반도 전역이 그렇듯 개화기를 기점으로 공주의 모습은 크게 달라진다. 길이넓어지고 이국식 건축물이 들어선다. 서양식 벽돌 건물, 일본식 목조 건물이 등장한다. 흙과 나무로 만든 옛집이 무너지면, 벽돌을 쌓아 집을 지었다. 

    2층 이상 건물도 새롭게 등장한다. 초가집 수 채를 첩첩 쌓은 규모로 교회와 성당, 외국인 선교사의 숙소가 들어섰다. 이들 건축물 대부분은 도시를 내려다보는 산등성에 지어졌다. 개화기 공주 전경 사진에서 이들 건축물은, 듬성듬성한 민가사이에서 한눈에 알아볼 만큼 우람하다.

    중학동구선교사가옥부터 영명학교까지 걸었다. 선교사가옥은 1921년 건립한 공주 최초 서양식 주택 건물로, 입구가 반 층 높이에 위치한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어엿하게 보존하고는 있지만, 찢기고 부서진 소파와 각종 건축 자재가 주변에 뒹굴어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가볍게 훑고 영명학교로 향했다.


    길 위로는 사애리시-샤프 부부의 일대기가 반복 등장한다. 부부는 공주에 처음 정착한 기독 감리교 선교사들이다. 특히 사애리시는 유관순 열사의 수양모이자 첫 스승, 충청 지역 최초 여학교인 명선여학당(현 영명학교)을 설립하며 근대 교육의 기반을 닦은 인물로 추앙받는다. 석조 동상과 사진, 영명역사관 자료에서 그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종교와 무관하게 영명학교 일대는 공주 여행에서 꼭 둘러보기를 권한다.

    근대 건축물이 들어설 무렵 이곳에서 찍은 사진을 반투명하게 전시해놓았다. 과거와 현재를 겹쳐 볼 수 있는 셈이다. 초가집과 기와집 일색이던 민가는 단단한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었다. 다만 낮고 길게 펼쳐진 봉화산 자락은 예전 그대로 도시를 안온하게 품은 모습이다.


    영명학교 너머 길은 중동성당으로 이어진다. 계단을 제법 올라야 성당 앞에 설 수 있다. 성당의 건축 형태는 “종교 건물의 위엄을 표현했다”는 소개 그대로다. 수직으로 뻗은 기둥은검은 벽돌로 세우고, 나머지 면면은 붉은 벽돌로 발랐다. 종탑은 성당 입구에서 고개를 한껏 꺾어야 보인다. 

    건물면적만큼 정원이 없었다면 특유의 엄숙함에 짓눌렸을 듯싶다. 건축물은 1937년 완공된 모습 그대로 잘 보존해 엊그제 지은 것처럼 매끈하다. 오래된 성당은 고요했고 사색이 절로 피어났다. “몸의 힘 없이는 마음의 힘도 오래 갈 수 없었어.” 작가 이슬아의 문장이 문득 떠오른다. 사람을 설명한 말인데 어쩐지 종교 건물에 절묘하게 대입된다. 중동성당처럼 힘 있는 건축물에 머무르면 마음(종교적신실함)도 오랫동안 굳게 간직할 수 있을까.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건만 휙 불어온 찬 바람에 간데없이 흩어졌다. 계단을 오르느라 벗었던 점퍼를 다시 껴입고 내리막길로 향한다.

    공주의 근대 문화는 제민천을 사이에 두고 길게 펼쳐진다. 중학동구선교사가옥부터 중동성당까지 는 제민천의 동쪽이다.

     

    역사영상관과 풀꽃문학관, 공주제일교회는 서쪽에 있다. 또 다른 건축 유산을 찾아 나서기 위해 제민천을 따라 잠시 걸었다. 옛 하숙 마을을 재현한 게스트 하우스부터 공주 출신 시인 나태주의 작품을 새긴 담벼락, 1970~1980년대 풍경을 재현한 벽화가 시선을 끈다. 수십 년 된 한옥을 개조한 찻집에 들러 잠시 목을 축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공주 중동성당


    역사영상관은 1930~1985년에 공주읍사무소로 쓰인 건축물이다. 일제 강점기 공공 기관의 위엄을 뽐내려는 듯, 아담한 몸체에 어울리지 않는 우람한 전면부를 내세우고 있다. 내부는 역사 문화 공간으로 재개관하면서 공주를 담은 사진과 영상을 전시하고 있다.

     

    뒤늦게 고백하자면 코로나19로 인해 내부 관람은 불가했다. 풀꽃문학관과 공주제일교회도 마찬가지다. 모두 5월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돼야 다시 문을 열 예정이다. 역사영상관은 당나귀 등에 물건을 싣고 나르는 상인들의 사진부터 1960년대 이후 공주시 소재 중·고등학생의 기념사진, 배 타고 금강을 유람하는 사진 등 공주의 과거가 박제돼 있다. 

    풀꽃문학관은 1900년대 초 일제 강점기 공주 헌병대장의 관사로 사용한 일본식 가옥 을 거의 원형 그대로 보수한 곳이다. 1920년대 공주 시가지를 담은 사진 엽서에도 등장했을 만큼 오래된 건축물이다. 현재는 나태주 시인 기념관이자 시인의 작업실, 문학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된다. 

    내부로 들어갈 수 없어 외관을한 바퀴 훑고 돌아 내려오는데, 뒤돌아보니 어느새 시인이 물조리개로 정원에물을 주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던 고운 꽃잎은 하루하루의 정성으로 그렇게 피어났을 테다.

    공주제일교회는 공주에 뿌리내린 기독교 역사와 함께 독립운동의 자취를 보여준다. 교회 건물은 1930년 착공, 1931년 완공해 종교 건물로 이용하다 한국전쟁 당시 허물어진 것을 1955년 개축했다. 옛 모습 그대로인 부분은 벽체 일부와 굴뚝 부분이라고 전해진다. 예배당 입구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도 눈여겨 볼 만하다. 

    우리나라 스테인드글라스의 선구자 이남규의 초기 작품이 남아 있다. 투박한 유리 조각을 다닥다닥 붙여 포도송이를 형상화했는데, 오늘날의 매끈한 스테인드글라스와 달리 올록볼록하다. 투박하지만 그래서 더 멋스러운 유산이다.

     

    공주역사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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